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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역사 달성토성

대한인 2016. 8. 25. 03:56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의 역사 달성토성

  • 류혜숙기자
  • 201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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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게 흩어지는 겨울 흙내 수많은 시간의 파편들이 土城 아래에 쌓였으리라

달성의 최고정은 12m정도. 고지로 오르는 길 군데군데 토성 위에 석축을 가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지역 지배세력의 거주지였던 달성. 토성 위로 넓은 길이 나 있다.
자연의 구릉위에 쌓아 올린 달성 토성은 정문과 가까워질수록 완만해진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산책객이 보인다.
1963년 사적 제 62호로 지정된 ‘대구 달성’의 사적비.
달성 공원의 잔디광장. 왼쪽의 두 그루 나무 가운데 한 그루가 순종황제가 심은 가이즈카 향나무로 추정된다.
성곽 길에서 성 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여럿이다.

세종의 지리지에 ‘451보’라 했다. 둥글게 말아올려진 토성의 길이. 지금은 어느 정도일까, 걸음을 세어 본다. 저마다의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 그 자박자박한 진동에 옅게 흩어지는 겨울 흙내가 달다. 수목의 무성한 가지 사이로 대구가 펼쳐져 있다. 걸음을 잊은 이들이 가만 서서 대구를 내려다본다. 가슴을 쫙 펴고, 마치 군주처럼. 이 토성이 처음 쌓인 것은 1800여 년 전, 달성은 청동기시대 이후 이 지방의 중심 세력 집단이 거주했던 곳이었다.


1800여 년의 역사…대구의 중심지
이상화 시비·전국 첫 어린이헌장비
허위·이상룡 선생 뜻 기리는 비 등
공원은 대구 역사의 상징으로 가득

◆달구벌의 원형, 달성

대구는 신라 때 달구화현이라 불렸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대구현이 되었다. 달성이란 이름은 달구화 또는 달불성에서 유래되었는데, 성의 축조 시기는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 첨해이사금조에 ‘15년(261) 춘 2월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는 내용이 역사가 전하는 달성의 최초 기록이다. 달성은 삼한시대에서부터 시작해 신라, 고려, 조선,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대구의 역사이며 그중에서도 달구화, 달구벌, 대구로 이어지는 역사의 원형이다.

세종실록경상도지리지는, ‘읍 석성은 군 서쪽 2리에 있다. 둘레를 돌아오는 데 451보이며, 안에 샘이 둘 있다’고 전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산성은 대구부의 서쪽 2리에 있으며 1390년에 돌로 쌓았다. 둘레를 도는 데 451보이며 높이는 6자, 군창이 있고 우물 넷이며 여름 겨울에 마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부의 서쪽 4리에 석축이 있는데 둘레는 944척이고 높이가 4척이며 안에 세 곳의 우물과 두 곳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의 기록에는 ‘주회가 783간(약 1천424m), 최고정이 53척(약 16m), 면적 1만2천892㎡(3천900여평)로 자연의 구부에 인공의 성곽을 두른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지금 둘레는 약 1천300m정도, 내 걸음으로는 431번이다.

정문 앞에는 달서천의 지류가 흘렀다. 지금은 복개되어 주차장이 되었지만 정문 성벽 바로 아래를 감싸 흘러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했었다. 성벽은 자연의 구릉 위에 쌓아 올렸다. 그래서 길은 오르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리드미컬하게 흘러간다. 낮은 곳은 5m, 높은 곳은 12m 정도로, 단애처럼 아찔하고 까마득한 곳도 있다. 흙길의 가장자리나, 상승하는 부분에서는 큰 돌덩이들도 드러나 있는데, 이는 후대에 토성 위에 석축을 가했던 흔적이다.

◆관아가 있던 자리, 달성공원

달성은 충분히 도도할 만했다. 성 안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관아가 있었다 하고, 고려 중엽인 정종 때부터는 달성서씨가 세거했다. 조선조 세종 때에는 관아의 부지로 결정되었는데, 달성서씨의 종손인 구계 서침 선생은 흔쾌히 내놓았다고 한다. 선조 때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지만 정유재란으로 불타고 말았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달성은 일본군의 야영지였다. 적어도 그때가지 달성은 성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달성을 일종의 기념비로 만들고자 했다. 1905년 일본 수비대장과 일본 거류민단은 달성을 공원으로 만들고, 1906년에는 명치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황대신궁 요배전을 세웠고 1914년 대구신사를 조성했다. 달성의 공원화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고 그 결과 달성은 그들에게 신성불가침의 기념비적 공간이 되었다. 1909년 1월 달성공원을 찾은 순종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가이즈카 향나무를 식수했다. 정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공원의 한가운데에, 그때의 것으로 생각되는 향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나무는 참으로 멋지게 살아 ‘잊지 말자 국치’의 깃발처럼 휘 뻗어 있다.

대구신사는 1946년에 철거되었고, 1963년 달성은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으며, 1966년이 되어 요배전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꽃사슴 다섯 마리를 기증하면서 달성공원에는 동물원이 들어섰다. 지금 달성은 마치 케이지처럼 변방에 물러서 있다.

◆ 공원의 기억

사자가 포효한다. “사자 울음소리 첨 들었네. 아이고 산에서 만나면 식겁하겠다.” 호랑이가 늘어져 잔다. “호랭이! 호랭이!” “호랑아 카고 불러야지 호랭이 카마 일나나!”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동물원은, 즐거움을 준다. 오래전 공원의 문지기로 일했던 키다리 아저씨 류기성씨의 기억도 멋지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비도 있고, 전국 최초로 세워졌던 어린이 헌장비도 공원 안에 자리한다.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왕산 허위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의 뜻을 기리는 비석, 대구에서 처형당한 수운 최제우의 동상, 석재 서병오 선생을 기리는 예술비, 죽농 서동균 선생을 기리는 문화비, 달성서씨의 유허비 등 대구 역사의 조각들이 공원에 있다.

토성의 흙 아래에는 수많은 시간의 파편들이 묻혀있을 거라 한다. 몇 년 전 동물원 이전 등 토성의 역사를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되었지만 현재 표류 중이다. 확보되었던 국비를 반납했으니 좌초라고 하는 게 옳다. 우리나라에 남은 가장 오래된 토성의 하나, 달성. 원형을 잘 간직한 고대 성읍국가 시대의 문화유산, 달성. 그것만은 변함없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찾아가는 길

버스 300, 414-1, 427, 808, 836, 939, 동구2, 북구3 등이 달성공원 앞에 선다. 개방 시간은 5시부터 9시까지, 동물들은 동절기 동안 10시부터 5시까지 만나볼 수 있다. 입장은 무료다. 토성을 한 바퀴 걷는 데는 15분에서 20여분쯤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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