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묘 :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은 나라가 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7개월만에 죽었고 1930년이 넘어서야 중국에 있는 묘지의 흙을 가져다 능산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망한 나라의 왕이라서 묘도 크지 않고...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아주 훌륭한 왕이었으나 말년에는 타락하여 결국 나라를 잃었다고 합니다. 이런 인식은 아주 오랫동안 내려왔는데, < 삼국사기>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무왕 33년에 태자에 책립되었는데, 어버이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일컬었다." 삼국시대 왕 중에서 이런 칭찬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16년 3월조에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왕이 궁인과 더불어 황음하고 놀기를 탐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 성충이 극간하니 왕이 노하여 옥중에 가두었다. 이로 인하여 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이 의자왕이 만년에 타락했다고 하는 유일한 기사입니다. 어떤 분은 이 기사 자체가 악의에 찬 것이라고 부정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유가의 사가들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을 정도로 타락한 집단은 아닙니다. 이 기사를 사실로 인정한다고 해도 두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첫째 의자왕의 황음과 놀이가 다른 왕들에 비해 나라를 파탄낼 정도로 극심했던 것인가? 둘째 왕의 방탕이란 것이 나라가 망하는 제일원인이 될 수 있는가? 첫 번 째 사실은 뒷받침 하는 하나의 사실은 좌평 성충이 왕의 황음을 극력 간하다가 옥에 갇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신이 목숨을 걸고 간하고 왕이 그를 죽일 정도라면 확실히 상황이 심각했고, 의자왕은 이미 판단력과 자제력을 상실한 상태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진짜로 있었다고 해도 성충이 숙청된 진정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바로 다음 해에 의자왕은 자신의 아들 41명을 모조리 좌평으로 삼는 대단한 인사를 단행합니다. 삼국시대의 정치제도와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만 대체로 좌평은 고려, 조선시대로 말하면 대신, 정승에 해당하는 직위로 국왕 일가와 귀족세력의 대표들이 차지하는 관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아들 41명을 다 임명했다는 것은 친위쿠데타나 다름없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왕후가 권력을 농단하고 많은 인물들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의자왕의 왕후가 누군지는 <삼국사기>에도 한마디 말이 없는데, 두 상황을 종합하면 의자왕은 재위 16년에 혁신적인 정치개혁을 해서 국왕과 왕실이 국정을 장악합니다. 그렇다고 귀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겠죠. 부인과 며느리를 제공한 가문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 시대는 근친혼이 강했던 것을 고려하면 <일본서기>에 요녀라고 묘사된(원래는 고구려 유민이던 어느 중이 쓴 역사라고 한다) 왕후와 며느리들도 왕실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대숙청을 합니다. 성충은(그가 왕실쪽 인물인지 귀족의 대표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징조를 알고 반대하다가 숙청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의자왕이 왜 이런 무리수를 두었는 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귀족세력과의 싸움일 수도 있고, 왕실 내부에 뿌리 깊은 내분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은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수도도 아닌 익산에서 모친과 가난하게 살았다는 설화가 말해주듯이 정상적인 왕위계승구도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든 백제가 말년에 약화된 주된 이유는 의자왕의 방탕이 아니라 백제 내부에 있었던 권력분쟁입니다. 이것을 의자왕 개인의 방탕으로 책임을 돌린 것은 유가적 역사학의 소산입니다. 그러면 의자왕은 억울한 것일까요? 아주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어떤 사정이 있었든 최고 통치권자는 국가 현실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국왕이 방탕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해석은 올바른 역사적 방법론은 아니지만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집권화된 국가일수록 최고 통치권자의 영향력은 큽니다. 그의 방탕과 타락, 혹은 편협한 정치는 국가경영에 당장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국왕의 타락이 나라를 망친다는 해석은 국가와 사회구조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제일 원인으로 제시될 때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경우 국왕의 방탕, 음행 보다는 그의 판단과 정국운영 태도, 정책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하겠지요. 백제 멸망 기사를 보면 백제의 내부가 분열되어 총력전을 펼치지 못하는 증거가 완연합니다. 백제가 효율적으로 대응했다고 해도 과연 당군을 무찔렀을 지는 미지수입니다만 그 후에 벌어진 백제 부흥군의 전투력을 보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의자왕은 이 부분에는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설혹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해도 최고 권력자는 벌어진 사태에 대한 최종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권력에 따라오는 상응한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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