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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한복판에 고구려 독자 왕국이 존재

대한인 2016. 10. 7. 14:48



당나라 한복판에 고구려 독자 왕국이 존재


당나라 한복판에 고구려 유민의 독자 왕국이 존재했었다.
고구려는 비록 서기 668년에 멸망했으나 그 생명력은 끈질겼다. 멸망한 지 150년이 지난 후에도 그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그것도 한반도나 만주대륙이 아닌 중국 대륙에 끼친 발자취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이정기라는 고구려 유민인데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장한 고구려인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이정기는 (구당서)에 따르면 본명이 이회옥(李懷玉)인데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668)한 지 64년이 지난 732년에 영주(營州)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태어난 영주는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 일가가 이주해 살았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강제 이주 당해 살던 곳이었다.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9년 당나라는 무려 20여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대상은 평양성을 비롯해 당나라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던 지역의 지배층과 백성들이었다. 고구려인들을 분산시킴으로써 고구려 부흥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들을 당의 내륙 깊숙한 곳으로 끌고가 분산 소개시켰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당나라 수도 장안이나 요동 서쪽으로 끌려간 이들도 있지만 오늘날 내몽고 서쪽의 감숙성(甘肅省)과 섬서성, 그리고 산서성(山西省) 일대로 끌려간 이들도 있었다.

또 산동반도 이남인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微省) 일부 지역도 이에 포함된다. 만주 서쪽인 요녕성(遼寗省) 지역인 요서의 영주(營州) 일대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 중에 치청왕국을 세운 이정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정기는 당시 요서 일대에는 영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군이 있었는데 이정기는 이 평로군의 비장이었다. 평로군에는 이정기의 고모 아들로서 내외종간이었던 후희일(候希逸)이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요서지역의 비장에 불과했던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었다. 안녹산의 난이 한창 기세를 떨치자 이정기는 안동도호 왕현지와 손잡고 안녹산의 친장으로 평로절도사로 부임한 서귀도를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 그는 왕현지를 평로군사로 옹립했으나 공교롭게도 왕현지는 곧 병사하고 만다. 그러자 당 조정은 왕현지의 아들을 후임 절도사로 임명시키려 하는데 이정기는 이에 반발해 그 아들을 죽이고 내외종인 후희일을 평로병사로 추대한다. 이정기 자신이 직접 평로병사에 부임한 것은 아니지만 드디어 이정기 집안이 평로군을 장악한 것이었다.

후희일은 안녹산이 사신을 보내 회유하자 그를 참수할만큼 철저한 반안녹산 노선을 견지했으나 이에 분개한 안녹산이 대군을 보내는 바람에 쫓기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북방 해족의 침공이 겹쳐 극심한 어려움에 빠진다. 이정기와 후희일은 이런 어려움을 집단 이주로써 풀기로 했다. 761년 후희일은 이정기와 근왕병 2만 명과 함께 발해만을 건너 산동성 등주에 상륙한다. 드디어 중국 대륙에 집단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후희일 · 이정기가 이끄는 군사는 보다 내륙의 청주(靑州)에서 당나라 관군과 만나 합류한다.

안녹산의 반란에 골머리를 썩던 당 조정은 안녹산과 합류하지 않고 관군을 찾아온 이들을 가상하게 여겨 후희일에게 산동성의 치주(溜州) ·청주 등 6개주를 관장케 하는 평로치청절도사(平盧濯靑節度使)로 임명한다. 후희일은 이에 만족을 느껴서인지 사찰을 건립하는 등 큰 역사를 일으켜 군사들의 불만을 샀다. 이 불만은 자연 이정기에 대한 신망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우려한 후희일이 이정기를 해임하려하자 군사들은 거꾸로 후희일을 내쫓고 이정기를 추대했다. 당 조정은 이정기를 문책하는 대신 그의 실권을 인정해 주는 회유책을 썼다. 당 조정은 이회옥이던 그의 이름을 자신을 바로 세웠다'는 뜻의 이정기(李正己)라고 바꾸어 주면서 평로치청절도관찰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蘿兩番使)로 임명했다.

비록 명목상이었지만 그에게 발해 신라양번사의 관직을 준 것은 그가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정기가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산동에 상륙한 것 같이 이 난은 종래 변경 방어를 위해 두었던 절도사가 국내 요지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어 전국에 번진 즉 군벌이 할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요 번진 중에는 하북 방면의 위박, 성덕, 노룡절도사가 있었으며 산동에 치청(溜靑)번진이 있었는데 이 치청번진의 주인공이 바로 이정기 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정기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산동성 일대로 세력을 확장해 10개 주를 치청군에 복속시켰다. 그의 군사는 무려 1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자치통감)의 기록대로 "이웃 번진(諦隣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강한 번진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후예 이정기는 이 지역을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삼았다. 관리를 임명하고 조세를 수취하는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면서 이웃 번진들과 혼인 등을 통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그는 777년 이영요의 난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강소성인 서주(徐州)와 조주(曺州) 등 내륙 5개 주를 추가로 점령했다. 이정기는 드디어 당 조정에 맞서는 최대 세력이 된 것이다. 이로써 조주를 기준으로 중원의 동부 지역은 이정기가 지배하는 형상이 되었으니 당 조정은 사실상 조주 서부 지역만 다스리는 분열 왕조가 된 셈이었다. 더구나 이정기는 당초 치청왕국의 치소(治所)였던 청주를 아들 이납 에게 맡기고 보다 서쪽의 운주(運洲)를 치소로 삼아 계속 세력을 서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갓 즉위한 당의 덕종은 서기 780년 변주에 성을 쌓고 이정기의 치청군의 서진을 막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정기도 이에 정면 승부하기 위해 변주와 가까운 조주 제음에서 군사를 훈련하는 동시에 사촌형인 이유에게 서주(徐州)를 맡겨 반격 태세를 취한다. 드디어 이정기 군사는 당군과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승리로 서주 근교의 용교와 와구를 점령한다. 용교와 와구의 장악이 중요한 이유는 이 곳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의 중심인 강회조운의 요충지 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대운하를 통해 올라오던 중국 남부지방의 물산운송을 두절시켰음을 뜻하는 것이다.

남부에서 물산이 올라오지 않게 되자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거꾸로 이정기의 치청왕국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정기는 한반도와 마주보는 산동성은 물론 안휘성과 강소성 일대까지 다스리는 치청왕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는당시 한반도 중남부를 장악했던 신라보다 몇 배 넓은 영토였다. 그러나 이 때 변수가 발생한다. 변주에서 당군과 격전을 치루어 승리를 거둔 이듬해인 781년에 이정기가 급서하는 것이다. 원인은 등창이었으며,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치청왕국의 주축은 이정기였으므로 그의 죽음은 치청왕국의 급격한 약화를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이정기와 동맹관계였던 산남동도(山南東道)의 양숭의가 당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함으로써 한축이 무너졌다. 아들 이남은 이정기의 죽음이 가져을 세력약화가 두려워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전열을 정비했으나, 이정기가 서주자사로 임병명던 당숙 이유가 덕주의 이사진 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하는 등 악재가 잇따랐다.

당투항이 잇따르면서 치청왕국이 분열된 것을 계기로 운하통운이 재개되었으나 이듬해인 782년 이납이 회서의 이희열(李希烈과 함께 용교와 와구를 재탈환하고 운하를 다시 불통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 조정은 치청왕국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존립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전국에 걸친 군사총동원령을 내리고 선무절도사 유현좌에게 치청왕국을 정벌하게 했다. 당나라와 치청왕국의 한판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당나라의 무리한 군사징발에 대한 군사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치청왕국 정벌을 위해 동원되었던 경원군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을 점령해버린 것이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칫 당의 멸망이 눈앞에 닥치자 다급해진 덕종은 반당 번진을 이끈 인물들에게 높은 관직을 내리면서 회유했다.

치청왕국의 이남도 그런 회유대상의 하나였다. 이납은 전국시대에 산동지역에 있던 제(齋)나라의 국호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때의 왕 칭호는 역대 중국 조정이 변방이나 이민족 왕조에 형식적으로 내리던 명목상의 국왕 칭호와는 달랐다. 이납은 명목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산동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명실상부한 임금이기 때문이다. 이남은 당 조정과 극단적인 대립은 피하면서 세력을 온존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서른 넷의 나이로 792년에 요절하고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었다. 이사고는 이납의 후기 정책을 계승하여 당 조정과는 극단적 대립을 피하면서 내부 세력을 보존하려 했다.

이로써 당 조정과의 갈등은 격화되지 않았으나 번진과의 충돌은 더욱 빈번해졌다. 치청왕국은 성덕번진과 소금 산지인 체주와 덕주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런 와중에 806년 이사고 마저 죽고 이복동생 이사도(李師道)가 뒤를 이었다. 이 무렵은 치청왕국 뿐만 아니라 중국 조정도 변화가 있었다. 한해 전에 당나라의 순종이 재위 1년을 못넘기고 세상을떠나고 헌종이 즉위했는데 헌종은 각 지방을 배경으로 독자적 권력을 행사하는 절도사를 억압하고 황제권을강화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임금이었다.

즉위초부터 군소 군벌들 토벌에 나선 헌종은 서기 815년 12월부터는 투항한 다른 번진들을 앞세워 치청왕국의 토벌에 나섰다. 치청왕국의 이사도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장안에 자객을 보내 번진토벌론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는 등 전력을 다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번진들이 당 헌종의 공세에 무너져 치청토벌전에 가담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치청왕국은 고립무원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후예 이사도는 정면대결에 나섰다. 결국 당군 및 각 번진들에다 신라인들까지 합세한 공세 때문에 치청왕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사도의 수하로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였던 유오(劉悟)가 정세의 불리함을 느끼고 이사도를 죽이고 당에 투항했던 것이다. 서기 819년 2월의 일이었다.

군사들에 의해 평로치청절도사로 추대된 지 54년, 이영요를 토벌하고 조주 서주 등을 점령해 15개 주를 손아귀에 넣고 독자권을 행사한 지 41년만이었다.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대륙의 한복판옳 장악한 이절기 일가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간 것이다. 이렇듯이 고구려 유민의 항쟁은 당나라로서는 매우 골치거리였던 것이다. 이정기 왕국도 역사에 나타나지 않던 내용이었으나 최근 소장 학자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당나라에서 독자 왕국을 건설한 위대한 우리의 조상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외에도 재야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하고 있는 고구려 유민의 행적을 우리얼에서는 지속적으로 재조명하여 여러분들에게 알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