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15]
안동 청계종가 ‘정향극렬주’
300여년 전 古조리서 비법 그대로…더위 이기는 여름 술의 부활
정향극렬주 |
내앞에 있는 청계종가의 종택은 학봉 김성일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당시 중국 상류층 주택을 유심히 살펴 그 장점을 채택해 지은 건물로, 독특한 면이 많아 건축적으로 주목을 받아온 건물이기도 하다
이 청계종택이 소장해온 귀중한 유물 중 하나로, 술 빚는 법을 모은 한글 필사본 옛날 조리서 ‘온주법(蘊酒法)’이 있다. ‘수운잡방’ ‘음식디미방’과 함께 안동의 3대 고(古)조리서로 불리는 이 책은 1700년대 후반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57종의 술 빚는 법이 소개돼 있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에서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양반가 여성들이 봉제사접빈객을 수행함에 있어서 술 빚는 일은 가장 중요한 소임이었다. 필사본 ‘온주법’이 있게 된 것도 이러한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종가마다 이런 가양주를 빚어왔지만 생활환경 변화와 일제시대의 금주정책으로 가양주 전통은 거의 단절되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전통 가양주의 맥을 다시 잇고 있는 종가도 늘고 있다.
청계종가에서도 최근 이 온주법에 나오는 술들을 재현해 선보이고 있다. 청계종가 종손의 동생인 김명균씨가 중심이 되어 술을 빚고 있다. 김씨가 청계를 기리는 사빈서원과 청계종택을 관리하며 실질적으로 종가 문화를 지켜가고 있다. 그가 재현한 술 중 탁주에 속하는 ‘정향극렬주’와 증류주(소주)인 ‘적선소주’를 소개한다.
◆ 여름철 더위 이기는 술 ‘정향극렬주’
‘온주법’ 첫페이지 |
온주법은 술 빚는 법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있어, 안동의 다른 두 종류의 고 조리서인 수운잡방이나 음식디미방과는 성격이 다르다. 57종의 술이 소개돼 있는데, 그 술들은 다른 고 조리서에도 소개돼 있는 것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술도 있다. ‘정향극렬주(丁香極烈酒)’는 다른 조리서에는 없고 온주법에만 나오는 술이다. 정향극렬주는 여름 술이며, ‘극렬’은 더위를 이긴다는 의미라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안동 3대 古조리서 중 하나인
온주법에만 소개된 ‘찹쌀 술’
점성 높고 달고 향기로운 특징
종손 동생 김명균씨 제조 성공
“온주법 57종 모두 재현하겠다”
정향극렬주는 찹쌀만 사용하는 술이다. 밑술을 담가 발효시킨 후 다시 덧술을 담그는 이양주(二釀酒)이나, 빚는 법은 간단하다.
찹쌀 한 되를 깨끗하게 씻은 뒤 잘 쪄서, 누룩가루 칠 홉과 끓인 물 한 되를 섞어 버무려서 항아리에 넣어 서늘한 곳에 둔다. 3일 후 밑술이 잘 발효되면, 이 밑술에다 밑술에 들어간 쌀의 10배 쌀로 고두밥을 쪄서 밑술과 섞는다. 덧술을 담근 후 7일 정도 후면 술이 다 익는다. 익으면 술을 잘 걸러 마시면 된다.
술은 점성이 매우 높고 맛이 달며 향기롭다.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먹기에 특히 좋은 술이다.
정향극렬주는 음력 오뉴월에 담가 먹는 여름 술이며, 더워도 이 술은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적선소주(謫仙燒酒)’는 소주 종류다. 안동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다. 술 이름은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이 좋아한 소주라는 의미다. 이백은 ‘적선’ ‘주선(酒仙)’ ‘시선(詩仙)’으로 불렸다.
멥쌀과 찹쌀, 누룩으로 만든다. 멥쌀(1.87㎏)을 깨끗하게 씻어서 물에 담가 하룻밤을 재운 후, 가루를 만들어 끓는 물(24ℓ)로 죽을 쑨 다음 누룩가루(1㎏)를 섞어 차게 식힌다. 이후 여름에는 3일, 겨울에는 5일이 지난 뒤 이 밑술에 찹쌀(5.3㎏)을 깨끗하게 씻어서 하룻밤 담갔다가 쪄서 차게 하여 섞는다. 이 술이 익으면 소주를 내린다.
안동소주와 비슷한 맛이다.
김씨는 그동안 정향극렬주와 적선소주를 비롯해 이화주(梨花酒), 연엽주(蓮葉酒), 서왕모유옥경장주(西王母乳玉瓊奬酒), 사절주(四節酒), 오호주(五壺酒), 국화주, 황금주 등 10종을 재현했다. 누룩 만드는 법도 재현했다. 서왕모유옥경장주의 ‘서왕모’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녀(神女)로, 불사약을 가진 선녀다. 수운잡방에 ‘서왕모가 술을 마셔 백운가(白雲歌)를 불러 멀리 있는 마을까지 떠들썩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술의 명칭에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옥경장은 ‘젖과 같고 옥처럼 맑은’의 뜻으로 술에 대한 찬사다.
전통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전통 가양주를 확산시키기 위해 김씨가 온주법 술 재현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온주법의 모든 술을 재현해 이 시대 사람도 즐기는 술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다.
◆ ‘온주법(蘊酒法)’ 내용
‘온주법’은 작자 미상의 조리서로 청계종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1987년에 발굴되었다. 책 명칭인 ‘온주법(蘊酒法)’은 표지에 적힌 한자 이름인데, 편찬자가 정한 이름은 아니다. 작자가 정한 이름은 ‘술법’이다. ‘온주법’은 저자의 남편이나 자손이 책의 품격을 더하기 위해 지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온주법의 ‘온(蘊)’의 뜻이 ‘쌓다’ ‘간직하다’ 등인 것으로 볼 때 온주법은 술 빚는 법을 모아놓은 책으로 풀이할 수 있다.
김명균씨는 가문의 족보 등 관련 문헌을 분석한 결과, 자신의 12대 조모인 예천권씨가 저자일 것으로 추정했다. 온주법 원본이 13대 조부인 표은(瓢隱) 김시온(1598~1669)의 사적을 기록한 ‘숭정처사표은김공사적략(崇禎處士瓢隱金公事蹟略)’의 뒷면에 기록돼 있는 점으로 볼 때, 표은의 며느리인 예천권씨가 그 주인공으로 가장 유력하다는 것이다.
1700년대 후반 안동지역 반가의 술과 음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두에서 술의 효용과 양반가에서 술을 빚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법도를 제시하고 있다. 즉 반가에서 술은 제사, 접빈객, 화목 도모에 필수적이므로 술을 빚을 때는 좋은 날을 택할 것을 비롯해 술 빚을 때 금할 사항과 조심해야 할 내용들을 적고 있다. 온주법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술법이다. 술은 신명을 움직이고 빈객을 기분 좋게 만드니 음식 중 이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고을의 정사(政事)를 술로써 안다고 여겼으니 양반 집에서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유일은 처음으로 술을 만든 두강(杜康)이 죽은 날이므로 흉하며….’
온주법에는 총 130종의 조리법이 실려 있다. 술법(양조법)이 57개 항목으로 가장 많고 누룩 만드는 법(3개 항목), 장(醬) 만드는 법(4), 병과류 만드는 법(14), 반찬류 만드는 법, 식품저장법, 약 만드는 법, 상 차리는 법 등이 담겨 있다.
온주법은 17세기의 ‘주방문’ ‘음식디미방’과 19세기의 ‘술방문’ ‘술 빚는 법’ ‘김승지주방문’ ‘양주방’ ‘주방’ ‘규합총서’ 등의 교량적 역할을 하는 책으로 평가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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