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2]
안동 서애종가 ‘중개(仲介)’
忠臣이 좋아하던 약과 … “제사상에 올려라” 선조가 특별 당부
중개(수박 오른쪽)가 진설된 서애 류성룡 불천위 제사상. 중개는 400여년 동안 변하지 않고 서애 불천위 제사상에 오르고 있는 음식이다. |
밀가루와 막걸리, 꿀 등으로 반죽해 직사각형으로 잘라 기름에 지져낸 서애종가의 중개. 서애 류성룡이 생전에 각별히 즐긴 음식이라고 한다. |
서애종가 종부가 종택 안채 대청에서 서애 불천위 제사상에 오를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
안동 하회마을(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종택이 있는 서애종가는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을 시조로 하는 종가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전쟁을 극복한 조선의 명재상이자 대학자이다. 서애종택은 충효당(忠孝堂)이라 불린다. 서애종택의 사랑채 이름이 충효당인데, 그 당호(堂號)가 종택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것이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지은 집은 아니다. 청백리였던 류성룡이 당쟁으로 삭탈관직 당한 후 1599년 2월 고향 하회로 내려왔을 때는 마땅한 거처도 마련되지 않았고, 타고 다닐 나귀조차 없었다. 하회마을의 옥연정과 연좌루 등에서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을 집필, 1604년에 마무리한 류성룡은 하회마을 근처 풍산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를 지어 살다가 별세했다.
충효당은 류성룡 별세 후 후손과 문하생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류성룡의 손자 졸재(拙齋) 류원지(1598~1674)가 유림과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먼저 안채를 지었고, 류성룡의 증손인 눌재(訥齋) 류의하(1616~98)가 사랑채를 완성했다. 사랑채 당호는 충효당으로 정했다. ‘충효당’이라는 당호는 류성룡이 평소에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할 것을 강조했기에 이를 받들어 지은 것이다.
류성룡은 임종할 무렵 자손들에게 남긴 시에서도 충효를 각별히 당부했다. 다음은 류성룡의 그 시다.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라/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
서애종가는 서애 류성룡의 불천위제사(음력 5월6일)를 400여년 동안 지내고 있는데, 이 제사상에 변하지 않고 오르고 있는 특별한 제수(제사음식)가 있다. 다른 종가 제사에서는 볼 수 없는 ‘중개(仲介)’라는 약과로, 류성룡이 생전에 즐겼던 음식이라고 한다.
밀가루·막걸리·꿀·소금 반죽
노릇하게 지져서 만든 음식
궁중음식 ‘중박계’서 유래
400여년 이어진 특별한 제수
서애 제사상 중앙에 올려
◆서애 류성룡이 즐겼던 약과 ‘중개’
지난달 2일 오후, 서애 류성룡 불천위제사 준비로 바쁜 충효당을 찾았다. 안채 대청에서는 종부와 차종부 등이 제사상에 오를 편을 쌓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쁜 가운데 잠시 틈을 낸 최소희 종부(86)와 차종손(류창해) 부부에게 중개를 비롯한 서애종가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중개는 류성룡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이었다고 한다. 벼슬을 하며 서울에 머물 때 궁중을 드나들며 임금이 내린 음식 중 중개를 특히 좋아했던 것 같다. 선조 임금은 그래서 류성룡 별세 후 지낸 제사 때 중개를 제수로 올리라고 특별히 언급을 했다고 한다. 또한 강릉부에서는 류성룡 장례 때 쓰라고 중개 77개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들려주었다.
중개는 이처럼 류성룡이 생전에 좋아했고, 그래서 그의 제사상에도 오르게 되면서 400여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특별한 제사 음식이 된 것이다. 그 재료나 형태도 크게 변한 게 없을 것이다. 서애종가의 다른 조상의 제사 때는 쓰지 않는다.
중개는 밀가루와 막걸리, 꿀(설탕), 소금 등을 재료로 해 반죽한 후 0.5㎜ 정도 두께로 민 다음 직사각형으로 썬다. 한 개 크기는 가로 14㎝, 세로 4㎝ 정도. 그런 다음 기름에 지져내 완성하는, 약과(유밀과)의 일종이다.
중개가 다 완성되면 중개 전용 제기 위에 중개 80개를 20단으로 쌓아올린 다음, 이 80개 중개보다 약간 더 큰 중개 2개를 덮어 마무리한 뒤 제사상에 올린다. 이 중개는 제수 중에서도 중요한 제수로 여겨 제사상의 중앙에 진설한다.
◆중개의 원조인 ‘중박계’
서애종가는 중개가 궁중음식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그 궁중음식이 ‘중박계(中博桂)’인데, 서애종가에서는 ‘중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유밀과 중 하나인 박계류는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고 반죽해 직사각형으로 큼직하게 썰어 기름에 지진 한과로 고배상(과일, 과자, 떡 같은 음식을 그릇에 높이 올려서 쌓은 상)에 많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배끼’로도 불리었는데, 잔칫상이 아니라 제향 음식으로 주로 쓰였다. 큰 것을 ‘대박계’, 중간 크기의 것을 ‘중박계’라고 했다.
중박계는 인조 때 인목대비의 장수를 위해 연 잔치를 기록한 풍정도감의궤의 ‘진풍정(進豊呈)’ 등 궁중의 잔치기록과 ‘국조오례의’(국가와 왕실, 왕과 신하의 관계 등을 규정하는 제도를 도식으로 엮은 책)에 기록된 진전(眞殿)의 찬실도(제사음식을 차리는 방법을 그린 그림)에도 등장하고 있다. 중박계는 두툼해서 속까지 다 익히기 어려워, 잔치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다시 익혀 나눠먹었다고 한다.
중박계 반죽 재료로 밀가루, 꿀, 기름을 주로 사용하는데, ‘음식디미방’에는 밀가루 대신 쌀가루가 사용되고 있으며, ‘역주방문(歷酒方文)’에는 반죽에 술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서애종가의 특별한 설 음식 ‘초만두’
중개 외에 서애종가의 내림음식으로 설날에 장만해 제사음식으로도 쓰고 가족 친지들이 함께 나눠먹는 초만두가 있다. 만두피를 따로 만들어 속을 넣는 방식이 아니라, 메밀가루 반죽에 속재료를 함께 뭉쳐 만드는 방식으로 만든다. 돼지고기와 소고기, 두부, 무, 소금 등을 사용한다.
식초에 찍어먹어서 초만두라고 부른다는데, 간식이나 술 안주로 제격이라고 한다. 류창해 차종손은 “어릴 때는 초만두가 별로 맛이 없어서 잘 먹지 않았는데 지금은 맛이 좋아 즐겨 먹는다”고 했다. 설날에 특별히 해먹는 겨울철 별미인 셈이다.
차종손은 “종가 음식이 잘 전해오려면 종가의 경제력이 계속 유지돼야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충분한 경제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중개나 초만두는 모두 재료도 구하기가 쉬운 데다 비교적 서민적인 음식이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애종가는 다른 많은 종가들과는 달리, 계속 가양주를 담가 제주로 사용해오고 있다. 특히 경주 최씨 가문의 후손인 현 종부의 술 빚는 솜씨가 뛰어나 서애종가의 제주를 한 번 맛본 사람은 누구나 그 맛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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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정으로 정신 혼탁해져
탐하는 마음 잘 다스려야”
◆서애 류성룡의 ‘양생계(養生戒)’
서애 류성룡의 건강법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인 ‘양생계(養生戒)’ 일부를 소개한다.
“창자와 밥통은 오미(五味)에 지져지고, 정신과 기력은 육진(六塵·여섯 가지 욕정)으로 어둡고 흐리멍텅해져서, 더럽고 혼탁한 기운은 마음속에 가득하고, 청명하고 순결한 성품은 타고난 성질을 잃게 되어 젊을 때 죽는 일을 초래하기도 한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타고난 기력이 매우 약해 질병에 자주 걸렸으며, 타고난 체질이 지극히 허약하여 추위와 더위에 쉽사리 해를 입게 되니, 참으로 몸과 마음을 휴양하여 건강을 보전하고 활력을 기르는 일을 지극하게 하고, 몸의 조리와 보호를 심절(深切)하게 하며, 음식을 적게 먹어 몸의 오장을 화평하게 하고, 탐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줄여서 그 참된 기력을 배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걱정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양심(養心·마음을 잘 다스려 건강하게 함)하는 것으로써 양생하고자 할 따름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양심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라고 했다. 아아, 더할 수 없이 극진한 말이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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