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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4] 해남윤씨 종가 ‘비자강정’

대한인 2016. 10. 12. 12:19

[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4]

해남윤씨 종가 ‘비자강정’

  • 김봉규기자
  • 2014-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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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종택 보호’ 500년 前 심은 비자나무 … 후손은 열매로 보답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숨결이 스며 있는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해남의 대표적 문화유적이기도 한 녹우당은 안채와 사랑채, 사당 등을 포함한 해남윤씨(어초은파) 종택 건물 전체를 이르는 이름으로도 사용되지만, 원래는 사랑채에 붙여진 이름이다.

종택 건물 중 사랑채인 ‘녹우당’은 겹처마 양식의 차양(遮陽)이 눈길을 끄는 건물인데, 수원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원래 이 건물은 윤선도에게 세자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효종이 나중에 스승 윤선도를 늘 곁에 두고 싶어 수원에 지어준 집이다. 윤선도는 효종이 승하한 뒤 모함에 빠져 낙향하게 되는데, 효종과의 정을 생각하며 이 집을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온 것이다. 현종 9년(1668),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의 일이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나중에 정해졌다.

해남윤씨 종택을 처음 지어 정착한 사람은 윤선도의 4대조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1476~1543)이다. 이 종택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가 태어나 자라며 학문과 예술의 혼을 키운 곳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다.

이 녹우당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대표적 음식이 비자강정이다. 지금은 윤형식 종손(81)과 김은수 종부(77)가 종택을 지키며 비자강정, 감단자 등 종가음식 문화도 이어가고 있다.


◆ 비자나무 열매로 만들어 제사상에 올려온 ‘비자강정’

수백년 전부터 고산 윤선도와 어초은 윤효정의 제사상에 오르고 있는 ‘비자강정’. 보라색 부분은 종부가 최근에 땅콩 알맹이로 개발한 강정이다.

이 종가는 윤효정과 윤선도 두 선조를 불천위(不遷位·4대 봉제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 제사를 지내며 기리고 있는 인물의 신위)로 받들고 있는 가문이다. 두 사람의 사당이 따로 있고, 종손의 4대조 신주를 모시는 사당(추원당)이 따로 있다. 종택에 이처럼 3개의 사당이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이 가문의 불천위를 비롯한 조상 제사상에 오래전부터 오르고 있는 음식이 비자강정이다. 해남윤씨 종택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비자강정은 종택 뒷산(덕음산)에 선조들이 조성한 ‘비자나무숲’에서 채취하는 비자나무 열매로 만든다.


윤선도 4대조 윤효정이
뒷산에 비자나무 심어
풍수 차원 비보림 조성

조상 뜻 깊이새긴 후손들
나무 열매로 만든 강정
수백년간 제사상에 올려


비자 열매를 줍거나 따서 씻지 않고 그대로 옹기 항아리에 넣어 일주일 정도 삭힌다. 비자를 씻지 않는 것은 진한 향을 살리기 위해서다. 항아리에 넣어둔 비자 열매는 껍질이 까맣게 삭는다. 삭은 껍질을 벗기면 땅콩 같은 알맹이만 남는다. 알맹이는 햇볕에 일주일 정도 말린다. 흔들어 보아 딸랑딸랑 소리가 나면 잘 마른 상태다. 다시 따뜻한 방에서 3일 정도 말린 뒤 프라이팬에 볶으면 누릇누릇해진다. 그리고 껍질을 벗긴 다음 조청이나 꿀을 발라 볶은 통깨를 고물 묻히듯 묻혀 비자강정을 완성한다.

비자강정은 비자 열매의 쌉쌀한 맛과 독특한 향이 별미다. 해남윤씨 종가는 비자강정이 윤효정의 제사가 시작될 때부터 제사상에 올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자강정과 함께 감단자도 오래전부터 이 가문에 내려오는 음식이다. 가을에 떨어진 감을 비롯해 익지 않은 감을 따서 가마솥에 푹 고아 거른 뒤 찹쌀가루와 섞어 다시 고아 식힌 후, 콩고물과 흑임자 등을 묻혀 완성한다. 이 감단자 역시 오래전부터 불천위 제사상에 오르고 있는 음식이다. 제사상에 오르는 편(떡)의 웃기떡 중 가장 위에 올린다. 이 감단자는 특히 맛이 좋아 제사가 끝나면 서로 먹으려고 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 비자강정의 산실인 종택 뒷산 비자나무 숲

비자강정의 주재료인 비자나무 열매.

종택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덕음산 중턱에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숲이 있다. 1972년에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은 윤효정이 500여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녹우당에서 500m 정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비자나무 숲이 나온다. 가장 큰 비자나무는 높이가 20m 정도 되고, 가슴 높이의 지름이 1m가량 된다. 비자나무들은 소나무와 동백 등 다른 나무와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는데, 아름드리 비자나무 400여 그루가 9천여평(3만여㎡) 곳곳에 어우러져 ‘녹우(綠雨·푸른 비자나무 잎이 스치며 내는 소리)’를 내리고 있다.

윤효정은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노출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며 비자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풍수 차원에서 사시사철 푸른 잎을 유지하는 비자나무를 심어 비보림을 조성한 것이다. 그후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비자나무숲을 잘 보존하며 가꾸어왔다.


◆ 고산의 건강비결

고산연보(孤山年譜)에 보면 윤선도에 대해 ‘용모가 단정하고 안색이 엄숙하며 굳세어 대하는 사람이 바로 볼 수가 없고 쏘아보는 눈빛이 섬연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직설적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품인 윤선도의 풍모는 이 표현으로 보아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장수를 한 윤선도는 81세의 노령에 전라도 광양 유배에서 돌아와 보길도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병으로 눕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당시로서는 천수(天壽)를 누리고 갔다고 할 수 있다.

윤선도는 학문과 함께 의술에도 밝았다. 그와 정적 관계에 있던 원두표(元斗杓)가 병이 들어 어떤 약을 써도 효력이 없자 윤선도의 처방을 받아 병이 나았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그는 55종의 다양한 처방전을 다룬 민간요법 관련 저서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고산의 의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윤선도의 장수비결과 관련해 그가 건강을 위해 만들어 마셨던 술이 회자되기도 한다. 윤선도는 술을 즐겨 마셨는데,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경옥주(瓊玉酒)와 국활주(國活酒), 오선주(五仙酒) 등이다.

‘보길도지’를 보면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은거할 때 매일 새벽에 닭 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작은 옥배로 경옥주 한 잔을 마시고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경옥고를 술에 타서 마시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국활나무 목피를 고약으로 만들어 상비약으로 쓰면서 국활주를 빚어 마시기도 했다. 금쇄동(金鎖洞)에서 은거생활을 할 때는 오선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는 ‘오선주방(五仙酒方)’에서 창출(蒼朮), 송절(松節), 죽엽(竹葉), 오가피(五可皮), 맥문동(麥門冬), 계실(桂實) 등의 재료를 넣어 빚은 약용주를 ‘오선주’라 이름 짓고 ‘해(年)의 운이 흉하여 질병이 성할 때 이 여섯 가지 약제를 취해 빚어 마시면 아주 좋다’고 했다.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던 윤선도는 인조와 효종 때 중궁전과 대비전의 약제 처방을 위해 초청되기도 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비자나무 잎에 바람이 스치니 비가 내리는 듯
조선 명필 이서가 이름 짓고 편액 써

◆ ‘녹우당’ 이야기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옥동(玉洞) 이서(1662~1723)가 이름을 짓고, 편액 글씨도 직접 썼다. 이서는 당대 최고 명필로, 동국진체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이서는 윤두서와 절친한 사이다. 윤두서는 윤선도와 더불어 해남윤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 녹우당에서 태어나 자라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서의 동생인 성호 이익과도 벗으로 지냈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편액 글씨를 써 준 것은 이런 사이였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해남윤씨 종택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8세 때 가문의 종손인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으로 왔다. 그는 ‘소학’을 보고 감명받아 평생의 가르침으로 삼았고, 과거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우암 송시열과 함께 봉림대군 효종과 인평대군 현종을 가르쳤다. 남인 가문에 태어나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며, 20년 넘는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관직생활을 10년 정도 했으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풍족한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표출됐다. 25년을 녹우당과 보길도에서 보냈다. 보길도 유배생활 중 지은 ‘어부사시사’는 그의 대표작이다.

녹우당의 ‘녹우’는 종택 뒤에 있는 비자나무 숲의 푸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부대끼면서 사르락사르락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빗소리 같다고 해서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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