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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6] 안동 지촌종가 ‘건진국수’

대한인 2016. 10. 12. 12:32

[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6] 

 안동 지촌종가 ‘건진국수’

  • 김봉규기자
  • 201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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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처럼 가는 면은 종부의 자존심…“밥과 함께 내는 건 결례”


안동 지촌종가에서 여름철 귀한 손님 접대를 위해 차려 내던 건진국수 상차림. 지촌종가는 건진국수를 밥과 함께 내놓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농촌진흥청 제공>

콩가루 섞은 반죽 가늘게 썰어
육회·말린 물고기 등과 함께
귀한 손님 대접하는 특별식
면발 가늘수록 품위 더해

맛과 정성에 감탄한 佛대사
종손 부부 초청해 답례하기도

지촌이 좋아했던 물고기
제사상에 올리고 싶었던 후손
이름까지 바꾸는 지혜 발휘

안동 지례예술촌. 이름만으로 보면 무슨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한 종가의 종택이 있는 곳이다. 바로 지촌(芝村) 김방걸(1623~95)을 시조로 하는 지촌종가의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이 안채와 사랑채, 지촌서당, 사당, 제청(祭廳), 문간채, 주방채 등 11동이나 되니 작은 마을이라고 봐도 될 만하다.

이곳에는 지촌종가의 13대손 김원길 종손이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종손이 시인이기도 해서 실제 예술인들이 종종 찾아와서 행사를 가지며 전통 종가문화를 체험하기도 한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찾고 있다.

종손은 1986년 지촌종택이 임하댐 건설로 수몰될 때 종택을 다른 종가처럼 멀리 다른 곳으로 이건하고, 안동시내에 살면서 한 번씩 찾아볼 것인지 고민하다, 최대한 가까운 곳에 옮기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정하면서 지금의 예술촌으로 탄생했다. 그 당시 고택 또는 종택이란 이름을 내세우면 외국인이 잘 인식하지 못할 것 같아서, 오지에 있지만 유명인이 찾아오는 명소로 만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촌’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한다.

종손 부부는 1989년부터 임하호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지촌종택을 지키며 종가문화를 고스란히 지켜오고 있다. 안동 시내에서도 30분 이상 차로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지촌종택에 내림음식으로 여름철 손님접대를 위한 별미인 건진국수가 이어져 오고 있다.

◆귀빈 접대용 여름철 별미인 건진국수

국수는 흔히 여름철에 쉽게 만들어 먹는 음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밥 대신 해먹는 간편한 대용식, 또는 한꺼번에 많이 해서 식은 밥과 함께 여러 사람이 먹는 요기용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촌종가의 건진국수는 그런 음식이 아니다. 여름철 종가를 찾는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특별식이었다. ‘건진국수’라는 이름은 국수를 삶아 찬물에 헹군 뒤 바로 건져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지촌종가 종부들은 대물림을 하며 오래전부터 여름철 종가를 찾는 귀빈들에게 건진국수를 대접해왔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혼합 비율은 4대 1) 반죽한 뒤 최대한 가늘고 곱게 썰어 뜨거운 물에 삶아 재빨리 건져내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없앤다. 그리고 건진 면에다 미리 준비해 둔 육수를 붓고 고명과 채소 등을 얹어 손님 상에 올린다. 육수는 보통 멸치를 사용해 만들지만, 말린 은어나 닭고기로 우려내기도 한다.

여기에다 육회를 비롯해 호박 돈적(엽전처럼 둥근 모양이어서 붙은 이름), 말린 민물고기 양념구이, 더덕구이, 명태 보풀 등을 곁들인다. 민물고기 말린 것을 자주 사용한 것은 종택이 반변천가에 자리하고 있어 민물고기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건진국수는 정식 밥상 대신에 대충 내놓는 음식이 아니라, 정식으로 차려내는 여름철 별미 고급음식인 것이다. 지촌종가 이순희 종부는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건진국수는 그냥 한 끼를 때우기 위해 간편하게 장만하는 음식이 아니라,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특별음식이었다. 그래서 밥과 함께 내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고 말했다. 종부는 “밥하고 같이 차려내는 것은 제대로 된 건진국수 상차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종부는 또 “건진국수는 면이 생명이다. 면을 실처럼 가늘게 썰면 맛도 달라지지만, 무엇보다 아녀자의 솜씨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 만큼 면을 얼마나 얇고 가늘게 만드느냐 여부에 자존심이 달려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건진국수는 이처럼 최대한 가늘게 썰고 바로 삶아 건져 아주 맛있게 만들어내야 하는 특별식이기에, 보통의 국수처럼 한꺼번에 많이 할 수도 없는 음식이며 공이 많이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이순희 종부는 음식 솜씨도 각별해서 최고의 건진국수 상을 내놓는다. 몇 년 전에는 프랑스 대사 부부가 지촌종택을 방문해 종부의 건진국수를 대접받고는 맛과 정성에 반해 종손 부부를 대사관으로 초청해 답례를 하기도 했다.

지촌종가 제사상에 오르는 말린 민물고기.


◆제사상에 오르는 말린 물고기

지촌종가의 제사 음식 중 다른 종가의 제사음식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음식이 있다. 말린 민물고기다. 물고기의 배를 따서 내장을 꺼낸 뒤 꼬챙이에 꿰어 말린 후 사용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제사상에 오르고 있다.

물고기 종류는 피라미, 은어를 비롯해 다양하다. 종택 앞을 흐르던 반변천에서 잡히던 물고기다. 지금은 원래의 종택터가 임하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지면서 임하호와 근처 길안천 등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말려 사용하고 있다.

제사상에 오른 말린 물고기는 제사를 지낸 후 튀겨서 반찬이나 안주로 먹는다. 평소에도 종종 조리해 먹기도 한다.

말린 물고기가 이렇게 제사상에 오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원길 종손은 “안동은 내륙 한가운데 위치해 바다 어물을 쓰기가 어려워 간고등어를 쓰곤 했는데, 간고등어도 구하기 어려운 집에서는 민물고기를 잡아 말려 제사상에 올리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종손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들려줬다. “‘치’자나 ‘리’자가 붙는 물고기는 제사에 안 쓰는 어물이다. 하지만 양미리 등을 엮어 말리면 그 모양이 호미처럼 되는데, 이것을 호메이(호미 사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호메이 고기’라 이름을 붙이고는 그것을 제사상에 올리기도 했다.” 제사상을 최대한 정성껏 잘 차리기 위해 고기 이름까지 바꿨던 모양이다.

또한 제수와 관련해 가난해서 곶감을 구할 처지가 안되는 집안은 곶감 대신에 토마토를 썼다고 한다. 토마토가 모양이 그래도 감과 비슷하기 때문인데, 제사상에 올릴 때는 ‘땅감’(땅에서 나는 감이라는 의미)으로 부르며 감의 일종으로 삼았던 것이다.

민물고기가 제사상에 오르는 것과 관련해 종손은 지촌 김방걸의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물고기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말없이 푸른 산 대하네 적막이 진실로 소원’
간소하고 청렴한 삶詩에서도 드러나

◆지촌 김방걸의 삶

지촌 김방걸은 학봉 김성일의 형인 약봉 김극일의 증손자다. 부친은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망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반변천의 도연(陶淵·중국의 대표적 시인 도연명에서 따온 지명)에 은거한 표은(瓢隱) 김시온이다. 지촌은 조선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으나 부친의 영향으로 은둔생활을 좋아해 40대 초반 도연에서 10리나 더 상류에 있던 지례에 집을 지어 분가하면서 호를 ‘지촌’이라 하고 지촌 가문의 입향조가 되었다.

간소함과 청렴함을 좋아하고 명리를 멀리하며 담박한 삶을 살았던 그는 평소 “인생은 적의(適意)한 것이 귀중한데 어찌 명리로 자신을 속박하며 굽실거려서 권문(權門)의 주구(走狗)가 될까"라고 말하곤 했다. 영양군수를 지내고 돌아올 때 수레에 국화 화분 하나뿐이었을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던 그는 58세 되던 해에 벼슬을 그만두고 지례에 돌아와 머물며 무언재(無言齋)를 마련했다. 그때 지은 시를 보면 그가 추구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고향에 돌아온 지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 유거에는 티끌 하나 침범하지 못하네/ 고기잡이 낚시질도 귀찮은 것을 알겠고/ 거문고나 바둑도 심란하게 느껴지네/ 공들여 쌓은 돌걸상(石榻) 바람이 쓸게 하고/ 매화 화단도 새가 와서 노래하게 둔다/ 이제까지 하던 일 모두 그만두고/ 종일토록 말없이 푸른 산 대하네’

친구에게 준 시에서는 ‘강 깊은데 쏘가리 살쪄 있으니/ 이 가운데 생애가 자족하도다/ 명성은 내 기대하는 바 아니고/ 적막이 진실로 소원이라네’라고 읊었다.

지촌이 이처럼 궁벽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둔생활을 즐겼던 지례는 1975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외진 곳이다. 임하댐 건설로 다른 종가는 안동 시내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종택을 옮겼지만, 지촌종가 종손은 마을 뒷산으로 옮겨 지금까지 은둔의 전통을 지키며 각별한 삶을 살고 있다. 지촌이 추구했던 삶을 따라 13대 후손도 ‘예술촌’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21세기형 종가의 한 모델을 일궈가고 있다 하겠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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