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13]
논산 명재 종가 ‘전독 간장’
고택의 숨은 과학이 빚은‘씨간장’ 300년을 이어오다
장독이 즐비한 명재고택 전경. |
명재종가의 간장. |
명재종가의 간장으로 만들어온 대표적 음식인 떡전골. <논산문화원 제공> |
1709년에 건립된 이 고택의 주인공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은 뛰어난 학행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이조판서, 우의정 등 18차례에 걸쳐 벼슬을 받았으나 실제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과 후학 양성을 하며 보내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었다. 그는 우암 송시열(1607∼89)의 제자였으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노론의 송시열과 대립하면서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인물이다.
안채·곳간채 사이 ‘바람길’
여름엔 시원, 겨울엔 따뜻
장독 온도 일정하게 유지해줘
그해 가장 맛있는 간장 골라
1년 뒤 새로 담근 장과 섞어
종가 설음식 떡전골·떡선
품평회서 1등…비결은 간장
‘충청도 양반’의 본거지였던 이 명재고택은 나지막한 뒷산이 감싸고 있는 양지바른 터에 자리하고 있다. 집 입구에는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돼 있어 운치를 더한다. 집은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 사랑채 앞에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샘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리고 고택 동쪽 마당에 수백개의 항아리가 줄지어 놓여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윤증고택 속에 담겨 있는 대표적 과학은 유체(流體)가 좁은 통로를 흐를 때 속도와 압력이 증가한다는 ‘베르누이의 정리’이다. 베르누이의 정리가 발표된 것은 1783년이니 물론 베르누이와는 무관하지만, 그 원리는 알았던 것이다. 안채와 곳간채 사이에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남쪽은 두 건물이 널찍이 떨어져 있지만, 북쪽은 처마가 맞닿을 정도로 붙어 있다.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곳 북쪽의 좁은 통로를 거치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기온이 떨어지게 된다. 이런 곳간채의 북쪽에 음식물이나 반찬거리를 보관해 두는 찬광을 두었다. 안채 대청마루 북쪽 문으로 여름 내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이 덕분이다.
겨울에는 북쪽에서 오는 바람이 이곳을 거치면서 한결 유순해진다. 남쪽 방에 찬바람이 덜 들고 더 따뜻한 이유다.
또 장독대가 안채 뒤쪽의 비탈에 마련돼 있는데, 햇볕이 잘 드는 이곳도 이 원리 덕분으로 일년 내내 다른 곳보다 비교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된다. 이 장독대가 명재종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씨간장이 보존되고 숙성되는 터전이다.
◆300년 이어오고 있는 씨간장 ‘전독간장’
명재고택은 평생 초가에서 살아온 윤증을 위해 후손과 후학들이 지어 준 60칸 한옥이었지만, 명재는 생전에 이곳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명재고택은 현재 명재 윤증의 12대 종손 윤완식씨(1956년생)가 지키고 있다. 명재종가의 이 종택에는 약 300년간 이어오고 있는 씨간장 ‘전독 간장’이 있다. 독은 항아리이고, 그 앞의 ‘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앞 전(前)’이고, 또 하나는 ‘전할 전(傳)’이다. 즉 앞 세대인 시어머니가 지켜온 장독을 후대 며느리에게 전하며 지켜온 간장이라는 의미다.
전독간장에 대해 종손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예전에는 종가의 식솔이 많아서 하루에 쌀 한 가마니가 기본이었다. 쌀 한 가마니로 하는 밥에 필요한 반찬을 장만하려면 간장도 만만치 않게 쓰인다. 그래서 간장을 많이 담그는데, 간장을 한 날 한 시에 담그더라도 맛은 독마다 다르다. 그 가운데 가장 맛있는 간장 독이 전독이 된다. 전독 간장은 먹지 않고 두었다가 다음해 장을 담글 때 항아리마다 조금씩 나누어 새로 담근 장과 섞는다.”
전독 간장이 명재종가의 ‘종자 간장’이 되는 것이다. 이듬해 또 가장 맛있는 간장 독을 골라 전독으로 특별히 관리하는 일을 해마다 거듭하면서 계속 더욱 맛있는 간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명재종가의 간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양창호 노종부는 “우리 집 간장은 이 지구상에서 최고 맛일 것이다. 금방 지은 고슬고슬한 쌀밥에 우리 집 전독간장을 넣고 비벼 먹으면 다른 반찬이 없어도 맛나게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곤 했다.
명재종가 간장은 요즘의 간장과 달리 매우 검으나 탁하지는 않고, 그렇게 짜지 않고 단맛이 감돌았다. 윤완식 종손도 금방 밥을 해서 날 계란을 하나 얹어 밥을 비벼 먹어보라고 권했다.
1998년 추석 때 한 방송국에서 전국의 대표적인 종가 여섯 곳을 선정해 종가음식 맛품평회를 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여러 종가를 제치고 명재종가의 떡선과 떡전골이 1등을 차지했는데, 그 비결은 간장 맛 덕분이었다.
떡전골이나 떡선은 명재종가의 대표적 설 음식이고, 또한 손님 접대용이나 집안 행사 때 만들던 내림음식이다.
추수가 끝나는 10월쯤 묵은 쌀로 가래떡을 뽑아 두고, 수시로 떡선이나 떡전골을 만들어 먹었다. 떡전골은 가래떡을 썬 뒤 간장 물을 부어 간이 배게 한 뒤 다진 쇠고기(양지살)와 석이버섯 등을 넣어 갈비를 우려 낸 육수로 끓여낸다.
◆허례허식 배격하고 검소를 강조한 윤증
윤증은 세상을 떠나면서 ‘제사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고 화려한 유밀과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후손들은 조상 제사상에 떡을 올리지 않고, 전도 올리지 않는다.
또한 명재종가의 제사상은 다른 양반가의 제사상에 비해 훨씬 작다. 가로 90㎝, 세로 60㎝ 정도에 불과하다. 제사상에 오르는 제수 수도 적을 수밖에 없다.
84세까지 산 윤증은 평소 소식을 했는데, 반찬은 세 가지를 넘지 않았다. 보리밥에 볶은 소금을 반찬으로 삼아 식사를 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윤증은 초가에서 소박하게 살았는데, 1709년 제자들이 돈을 모아 기와집을 지어주었으나 새 집에 들어가 살지 않고 초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 초가는 무너지려고 해 긴 나무로 지붕을 떠받쳐 놓고 있었는데, 그 선반에는 책이 가득했다고 한다.
고택에는 솟을대문이 없고, 집 앞에는 담장도 없다. 이와 관련해 아픈 사연이 있다.
1805년 고택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던, 공자 영정을 모시는 궐리사(闕里祠)가 근처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1830년에는 2㎞ 떨어져 있던 향교도 바로 옆으로 옮겨왔다. 종가는 자신들을 감시하러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실제 궐리사의 관리 등이 수시로 집 앞을 서성이며 출입자를 파악하며 집안을 엿봤다고 한다. 그래서 감시를 받을 바에야 다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그때까지 있던 솟을대문과 그 옆의 담장도 허물었다. 1850년의 일이라고 한다.
이런 사연의 뿌리에는 윤증 가문과 송시열 가문의 대립이 있다.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와 송시열은 친한 사이였다. 주자학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해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정통 유학을 어지럽히는 이단)’이라며 공격을 받은 윤휴와도 가깝게 지냈다. 송시열은 윤휴와 가깝게 지내는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윤증은 송시열 문하의 수제자이기도 했지만, 그랬다.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윤선거 부자와 송시열은 결별하게 되고, 여러 면에서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그런 관계 속에 주자학을 철저히 따르는 궐리사와 향교가 명재고택 바로 옆으로 따라온 것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윤증가는 본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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