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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14] 논산 백일헌 종가 ‘국말이’

대한인 2016. 10. 15. 04:38

[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14]

논산 백일헌 종가 ‘국말이’

  • 김봉규기자
  • 201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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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 얹은 밥에 육수 부어…제사 음식 나눠먹다 탄생

백일헌 종가에서 제사를 마친 후 음복음식으로 내놓던 국말이. <논산문화원 제공>
백일헌 이삼 종택의 사랑채 전경(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백일헌 종택은 백일헌 이삼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영조 임금이 지어준 건물이다.
충남 논산 지역의 대표적 고택으로 명재 윤증 종택과 함께 백일헌 이삼 종택을 꼽을 수 있다. 백일헌 종택(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은 종택 뒤의 굴참나무와 솟을대문 옆에 담장 대신 서 있는 은행나무 고목이 인상적이다. 가을날 노란 은행나무잎이 마당을 수놓고 있는 모습은 특히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이 은행나무는 무인이던 이삼이 말고삐를 매어두던 나무라고 한다. 백일헌(白日軒) 이삼(1677~1735)은 조선 영조 때 무관으로, 백일헌은 그의 호다. 주곡리에서 태어난 이삼은 포도대장을 거쳐 영조 원년에 어영대장을 지내다 당쟁에 관련돼 귀향했다가 뒤에 훈련대장이 된 인물이다.

친인척·마을사람 함께 음복
한꺼번에 많은 손님 접대하다
맛있게 나눠먹는 방법 찾아

잔칫상에 내놓은 특별 음식
타래과·율란·조란도 전해져

이삼 ‘이인좌의 난’ 평정하자
영조가 보답으로 종택 지어줘

백일헌 종택은 영조 임금이 이삼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1728년(영조 4) 이삼이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훈련대장으로 있던 이삼은 토벌대장으로 이 난을 평정했고, 덕분에 그는 공신반열에 올랐다. 영조는 난을 평정한 이삼에게 34명의 노비와 함께 자재와 목수, 일꾼 등을 하사해 종택을 지어준 것이다.

이 백일헌 종가의 종택에 공동체 문화를 드러내는 음식인 ‘국말이’를 비롯해 ‘타래과’ ‘율란’ ‘조란’ 등 가문의 내림음식이 전하고 있다.

◆공동체문화 전통이 담긴 ‘국말이’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종가에서 조상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봉제사접빈객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종가마다 봉제사접빈객과 관련한 음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종가는 불천위 제사를 비롯해 명절 제사, 4대조 기제사 등 제사만 해도 1년에 10차례가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이런 제사가 끝나면 제사에 참석한 일가친척은 물론 온 동네 사람이 와서 함께 음복을 하며 음식을 나눠먹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음식을 장만해 내놓는 일이 종부를 비롯한 집안 부인들에게는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국에 밥을 마는 ‘국말이’는 이런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을 제사에 참석한 사람과 마을사람이 함께 효율적이면서도 맛있게 나눠 먹는 방법으로 탄생했을 것이다. 백일헌 종택의 국말이도 제사 지낸 후 그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데서 유래되었다.

윤순중 종부는 시집을 온 후 가장 많이 한 일이 제사를 지내고 국말이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다. 종부는 이 국말이가 일제 치하에서도 장군집안의 전통을 유지하게 해주고,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지주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해주었다고 했다.

종가의 후한 인심은 가을 벼 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 백일헌 종가는 6·25 전쟁 전까지만 해도 1천석 이상의 벼농사를 지었다. 종가에서 타작을 하고 난 다음, 마을사람들은 이미 타작을 한 종가의 볏단을 다시 털었다. 그렇게 타작을 한 볏단을 털면 나락이 열 가마니 이상 나왔다는 것이다. 종가 어른들이 일부러 벼 이삭을 완전히 털지 않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일헌 종가 국말이는 밥 위에다가 고사리, 콩나물, 시금치, 숙주 등 나물을 얹은 다음, 끓인 육수(쇠고기 국)를 부어 완성한다. 육수는 쇠고기, 마늘, 무, 대파, 다시마를 넣어 끓인다. 다시마는 끓인 후 빼낸다. 쇠고기는 양지를 사용한다.

◆타래과와 조란·율란

이삼의 부친인 함평군 이사길이 주곡리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백일헌 종가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사길이 주곡리의 터줏대감인 청주양씨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이삼은 주곡리에서 태어나 자랐고, 근처의 명재(明齋) 윤증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백일헌 종가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잔치를 할 때 장만해 내놓은 특별 음식으로 타래과와 율란, 조란이 전하고 있다. 식사 주식이 아니라 잔칫상의 고명이나 또는 차를 마시며 곁들이는 다식, 간식으로 준비하던 음식이다. 이 간식도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오래 전부터 전해오고 있다. 지금의 종부와 차종부도 대표적 백일헌 종가 음식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타래과는 밀가루로 반죽한 뒤 홍두깨로 잘 밀어 직사각형으로 썰고 타래모양으로 만든 다음, 기름에 튀겨 꿀이나 조청을 바르고 잣가루를 묻혀 완성하는 과자다. 쑥, 시금치, 치자, 오미자 등을 사용해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 등 다양한 색의 타래과를 만들어낸다.

조란은 대추를 삶아 씨를 빼고 잘 다진 후 조청이나 꿀과 섞어 조린 다음, 다시 대추모양으로 만든다. 그리고 양쪽에 잣을 끼우고 계피 가루를 묻혀 완성한다.

율란은 밤을 삶아 속살을 밤모양으로 빚어 계피 가루나 잣가루를 묻혀 낸다.

◆백일헌 종택 이야기

종택이 있는 주곡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삼은 12세 되던 해에 당대 유명한 학자로 예학의 거두이던 명재 윤증을 만나게 된다. 윤증은 인근 지역인 노성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윤증과의 만남은 이삼이 학문과 인격을 갖추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윤증은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친자식처럼 대하며 각별히 가르치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윤증은 이삼의 뛰어난 체력과 힘을 미리 알아보고 무관이 되기를 권유했다. 윤증 문하에서 학문을 갈고닦으며 무예 외에도 문관으로서의 능력도 함께 길렀다.

이삼은 1703년, 별시에 장원급제하며 선전관(宣傳官)으로 출사한다. 이삼이 관직을 시작하던 시기는 정치세력의 기복이 매우 심하고,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가장 치열했다.

노론의 도움으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노론은 정치적 빚을 갚으라며 자신들의 중용을 촉구했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책을 내놓으면서 당파 간 견제·조정을 통해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이에 국내 각처에서 영조를 부정하는 반란이 일어난다. 이른바 ‘이인좌의 난’이다. 이 무신란은 그동안의 당쟁이 병란으로 발전한 것인데, 난이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충청·호남지역에서 임금의 혈통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서가 붙었다. 이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인좌를 비롯해 노론은 곳곳에서 영조를 끌어내리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훈련대장이던 이삼은 토벌대장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했고, 영조는 그에게 난에 가담했던 충청도 출신 반역자들의 가산을 몰수해 하사하는 한편, 모든 자재와 인력·예산을 하사해 거주할 집을 지어주었다.

그때 임금이 선물로 지어준 이 종택은 매우 독특한 점이 많은 건물이다. 특히 툇마루와 대청마루, 누마루 등 다양한 마루가 이채로우며 아름다운 창호도 눈길을 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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