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흙을 싸주신 아버지
비행기가 높은 하늘로 사라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36년 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까 1962년 가을, 나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군대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뒤, 미국 애모리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언어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은 데다가, 여비가 모자라서 서부 센프란시스코에서 동부 애틀란타까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게 되었다.
무려 74시간이나 걸리는 지루하고 두려운 여행을 혼자 감당해 내야 했던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데서 오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 게다가 사흘 동안의 긴 버스 여행은 나를 기진 맥진하게 만들었다.
9월 초, 마침내 학교 기숙사에서 대충 짐을 풀고 나니 불현듯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한 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네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구름 사이로 사라질 때, 나는 문득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어릴 때 시골서 큰 잠자리를 잡았다가 놓쳤는데, 그것이 하늘 높이 달아났었지, 그때 퍽 섭섭했었다. 네가 비행기를 타고 사라질 때, 그 아쉬움은 그때보다 컸었지…."
아버지께서는 평소 과묵하셨다. 그러기에 소년 같은 감상에 젖어 이렇게 편지를 쓰신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었으며, 그 사랑은 내 마음속에 흘러 들어왔다.
울적한 마음으로 기숙사 방에서 남은 짐을 마저 푸는데, 그 안에서 떠날 때는 보지 못했던 비닐 봉투가 나왔다. 봉투는 제법 묵직했다.
'분명 내가 짐을 꾸릴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궁금해 얼른 봉투를 뜯어보니 거기에는 한줌의 흙이 담겨 있었고, 흙을 샀던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적혀 있었다.
"완상아, 고향과 조국이 그립거든 이 흙 냄새를 맡아라. 이 흙은 우리집 뜰의 흙이다 이 흙 냄새 속에서 가족과 고향과 민족의 정을 느껴라."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불안과 불편함 속에 지내면서 가족과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던 때라, 그 흙 냄새는 나를 더욱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로 하여금 어금니를 굳게 물게 만들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족과 고향과 민족을 위해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라고, 정말 나에게는 아버지야말로 잊을 수 없는 분 중에 으뜸이다.
'나는 과연 내 아이들에게 이 같은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어버이인가' 라고 자문해 보면 '역시 아버지 앞에서 나는 작은 난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한완상/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총장 <좋은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