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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연표 (1800년대)

대한인 2013. 2. 10. 14:27

1848 (4181, 戊申) 조선 헌종 14
4월 17일 미국 포경선 체러키(Cheroke)호가 독도를 발견함(북위 37도 25분, 동경 132도 00분).
포경선 체러키호 항해일지

 

 

 

1849 (4182, 己酉) 조선 헌종 15
1월 27일 프랑스 포경선 리앙꼬르(Liancourt)호가 독도를 발견(북위 37도 2분, 동경 131도 46분)하여 Liancourt Rocks으로 명명함. 이 사실이 프랑스 해군 수로지와 海圖에 실림으로써 서양에 알려지게 됨.
3월 18일 미국 포경선 윌리암 톰슨(William Thompson)호가 독도를 발견(북위 37도 19분, 동경 133도 9분), “세개의 바위(3 rocks)를 보았다”고 기록함. 이는 조선 성종조의 삼봉도(三峯島)를 상기시키는 대목임.
포경선 윌리암 톰슨호 항해일지

 

 

 

1854 (4187, 甲寅) 조선 철종 5
4월 6일(러시아 구력) 푸쟈친 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극동 원정대 4척 중 하나인 올리부차호가 마닐라에서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던 중 독도를 발견함. 서도는 섬을 발견한 함정의 이름을 따서 ‘올리부차’로, 동도는 올리부차호의 최초 함정 이름이었던 ‘메넬라이’로 명명되었고, 두 섬은 조선의 영토로 파악됨. 독도에 관한 울리부차호의 탐사내용은 바스토크호의 울릉도 관측내용 및 팔라다호의 조선 동해안 측량내용과 함께 러시아 海軍誌 1855년 1월 호에 실려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작성한 「조선동해안도」의 기초자료가 됨.
올리부차호 항해일지(1854), 러시아 해군지(1855), 일본 해군성 수로국의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1876).

 

 

 

1855 (4188, 乙卯) 조선 철종 6


4월 25일 영국함대가 독도를 발견, 함정 이름을 따서 호넷(Hornet)으로 명명함.

영국의 수로잡지(Nautical Magazine)(1856), 프랑스 해군성의 수로지(1856년판, 제11권)

 

 

1870 (4203, 庚午) 조선 고종 7


1869년 12월 조선에 밀파된 일본외무성 관리들이 귀국하여 1870년 4월 복명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함. 이 복명서에는 ‘竹島(울릉도)와 松島(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되어 있는 始末’을 조사한 내용이 실려 있음.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1875 (4208, 乙亥) 조선 고종 12


11월 일본육군 參謀局이 朝鮮全圖를 작성, 이 지도에는 독도가 松島로 표기되어 실림으로써, 독도를 竹島(울릉도)와 함께 한국영토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육군 參謀局의 朝鮮全圖

 

 

 

1876 (4209, 丙子) 조선 고종 13


일본 해군 「朝鮮東海岸圖」를 작성함. 이 지도는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제작한 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재발행 작전지도인데,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부속도서로 표기하였음.
10월 16일 일본 국토의 地籍을 조사하고 근대적 地圖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시마네현에서 내무성으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키는지의 여부를 내무성에 질의. 내무성은 이에 대하여 약 5개월간에 걸쳐 시마네현에서 올라온 부속문서와 원록연간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교섭한 관계문서들을 모두 조사해 본 후, 죽도와 송도는 조선의 영토로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림.
武藤平學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 해군성이 1878년 4월과 9월 군함 天城丸을 파견, 송도의 실체에 대해 조사결과 송도가 조선의 ‘울릉도’로 판명되어 무등의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 각하됨.

「朝鮮東海岸圖」(일본해군성 수로국, 1876)

 

 

1877 (4210, 丁丑) 조선 고종 14
3월 17일 내무성은 죽도(울릉도)외 1도(송도-독도)가 일본과 상관없지만, “판도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국가최고기관 太政官에게 질품서를 부속문서들과 함께 올려 최종결정을 요청함.
3월 20일 일본국가최고기관인 太政官은 “품의한 취지의 竹島外一島의 件에 대하여 本邦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心得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 3월 29일 내무성으로 지령문을 보냄.
4월 9일 일본 내무성은 태정관의 지령문을 시마네현으로 보냄.
公文錄 內務省之部 1.

 
1881 (4214, 辛巳) 조선 고종 18
울릉도(鬱陵島)에 일본인 7명이 잠입하여 벌목하다가 搜討官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강원도 관찰사 임한수(林翰洙)가 馳啓하여 대비책을 강구할 것을 청함. 5월 22일 統理機務衙門의 啓言에 따라 이에 대한 書契를 일본 외무성에 보내게 하고, 부호군 이규원(副護軍 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에 임명함.
承政院日記 高宗 18年 5月 22日條, 日省錄 高宗 18年 5月 22日條, 高宗實錄 권18.



1881 (4214, 辛巳) 조선 고종 18
7월 일본 北澤正誠 '竹島考證'을 작성하고 이를 요약한 '竹島版圖所屬考'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함. 일본은 1880년 군함 天成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하는 한편, 北澤正誠으로 하여금 울릉도, 독도의 역사와 관련자료를 조사하게 하였음. 이 보고서는 지금의 松島는 元祿 12년(1699)의 竹島 즉, 울릉도로서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결론 내림. 그리고, <참고>항에 “울릉도 외에 죽도가 또 있지만, 아주 작은 小島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독도에 관한 내용을 부가함.

竹島考證(上中下), 竹島版圖所屬考

1882 (4215, 壬午) 조선 고종 19
4월 7일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이 하직함. 高宗은 울릉도(鬱陵島) 근방에 있다는 芋山島와 松島 竹島에 대해서 특별히 잘 살피고, 울릉도에 고을을 설치하기 위해서 地圖와 별도의 보고서(別單)를 상세히 작성할 것을 당부함.

承政院日記 高宗 19年 4月 7日條, 日省錄 高宗 19年 4月 7日條, 高宗實錄 권19.

1882 (4215, 壬午) 조선 고종 19
6월 5일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이 복명함. 그는 4월 30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5월 2일부터 10일까지 조사한 뒤 13일 평해 구산포(平海 邱山浦)로 돌아왔음. 그는 設邑이 가능하며, 羅里洞이 적합하다고 건의함. 또한 조사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나무를 도벌하고, 標木을 세워 松島라고 하고있는 것을 적발하였므로, 이를 일본공사와 외무성에 항의 하기로 함.

承政院日記 高宗 19年 6月 5日條, 日省錄 高宗 19年 6月 5日條, 高宗實錄 권19, 李奎遠의 鬱陵島檢察日記 「啓本草」

1882 (4215, 壬午) 조선 고종 19
8월 20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啓言에 따라, 鬱陵島에 島長을 差送케 함. 검찰사 이규원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던 함양사람 전석규(全錫奎)를 島長에 임명함.

承政院日記 高宗 19年 8月 20日條, 備邊司謄錄 高宗 19年 8月 20日條, 高宗實錄 권19, 李奎遠의 鬱陵島檢察日記.

1883 (4216, 癸未) 조선 고종 20
3월 16일 김옥균(金玉均)이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등사사(東南諸島開拓使兼捕鯨等事使)로 임명됨.

高宗實錄 권20, 21.

1883 (4216,癸未) 조선 고종 20
4월 일본해군수로국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를 발간함. 제2권 「조선국일반정세」에서 독도(リヤコ-ルト 列岩)를 소개함으로써,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스스로 밝힘.

寰瀛水路誌 第2卷(日本 海軍水路局, 1883. 4)

1883 (4216, 癸未) 조선 고종 20
4월 울릉도에 첫 이주민 16호 54명이 들어옴.
7월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에 들어온 첫 이주민의 정착상황을 조사함.

「光緖 9年 4月 日 鬱陵島開拓時船格糧米雜物容入假量成冊」, 「光緖 9年 7月 日 江原道鬱陵島新入民戶人口姓

1884 (4217, 甲申) 조선 고종 21
1월 11일 동남제도개척사 김옥균이 울릉도장 전석규(鬱陵島長 全錫奎)가 일본인과 담합하여 울릉도의 목재를 일본으로 반출시키고 있다고 장계함에 따라 전석규를 압송하기로 함.

承政院日記 高宗 21年 1月 11日條, 日省錄 高宗 21年 1月 11日條, 備邊司謄錄 高宗 21年 1月 6日, 11日條, 高宗實錄 권21.

1884 (4217, 甲申) 조선 고종 21
3월 15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울릉도(鬱陵島) 재개척에 있어 먼저 官守를 설치하고 그 후에 백성을 모집하여 땅을 개간하자고 啓언함에 따라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고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울릉도첨사를 겸하게 함(職名 : 鬱陵島僉使兼三陟營將).
6월 30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啓에 따라 평해군수(平海郡守)가 울릉도첨사(鬱陵島僉使)를 겸하게 함.

承政院日記 高宗 21年 3月 15日條, 日省錄 高宗 21年 3月 15日條, 6月 30日條, 高宗實錄 권21.

1888 (4221, 戊子) 조선 고종 25
2월 6일 내무부(內務府)의 계청에 따라 울릉도에 도장을 다시 설치하고 평해군 월송포에 만호진을 신설하고 월송진 만호(平海郡越松鎭萬戶)로 하여금 울릉도장(鬱陵島長)을 겸임하게 하고, 왕래하며 검찰케 함.

承政院日記 高宗 25年 2月 7日條, 日省錄 高宗 25年 2月 7日條, 高宗實錄 권25. 2월 6일條.

1894 (4227, 甲午) 조선 고종 31
12월 27일 울릉도가 이미 개척되었으므로, 수토에 필요한 자원의 조달을 위한 ‘鬱陵島搜討船格什物’을 영구히 혁파함.

高宗實錄 권32 12월 27일條, 官報 開國503년(1894, 甲午) 12월 27일.

1895 (4228, 乙未) 조선 고종 32, 개국 504
1월 29일 울릉도 수토정책(鬱陵島 搜討定策)이 이미 철훼되었으므로, 내무대신(內務大臣) 박영효(朴泳孝)의 上奏에 의해 월송만호(越松萬戶)가 겸하고 있던 울릉도장(鬱陵島長)을 별도로 임명하고, 매년 수차례 배를 보내어 島民의 疾苦를 살피게 함.
8월 16일 내부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의 주청에 따라 울릉도(鬱陵島)에 도장(島長)대신 도감(島監)을 設置하기로 함.
9월 20일 울릉도 사람 배계주(裵季周)를 울릉도감(鬱陵島監)으로 정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하기로 함.

承政院日記 高宗 32年 1月 29日條, 日省錄 高宗 32年 1月 29日條, 高宗實錄 권33, 官報 開國 504年 1月 29日. 제139호 開國 504

1898 (4231, 戊戌) 대한제국 광무 2
5월 30일 칙령 제12호(5월 26일)로 울릉도감(鬱陵島監) 설치를 반포함. 島監은 本土人으로 임명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함.

高宗實錄 권37, 官報 제962호 光武 2年 5月 30日.

1899 (4232, 己亥) 대한제국 광무 3
12월 19일 일본인의 도벌과 횡포가 계속되므로,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의 주청으로 울릉도(鬱陵島)에 시찰위원(視察委員)을 파견하기로 함. 시찰위원에는 우용정(禹用鼎)이 임명됨.

高宗實錄 권39, 官報 제1448호 光武 3年 12月 1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