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지배 사회에 맞선 어우동
성적매력으로 남성들 지배한 ‘500년전 마돈나’
윤리보다 자유 택해 … 종친-공신 20여명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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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남성들의 축첩을 허용하면서 여성이 이를 질투하면
쫓아내도 좋다는 안전판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성적 억압에 순종하며 박제화된 삶을 강요당했다.그러나 어우동은 달랐다.
조선초 성종시대(15세기), 승문원 지사(정3품) 박윤창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난
어우동은 집안이 부유했고 자색도 뛰어났다. 종친 태강수(泰江守:정4품)
이동(李仝)과 혼인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 앞길은 순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강요된 행복을 거부하고 여자로서의 해방된 삶을 꿈꾸면서
전혀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었다.
훗날의 사서(史書)들은 그를 구제불능의 음부(淫婦), 인륜을 저버린 반사회적
일탈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어우동에게 중요한 것은 윤리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자유였다. 20세기의 마돈나가 그런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미모와 매력을 남성 중심사회가 갈망하는 성적 환상으로
가공해 뭇 남성들을 한껏 조롱하는 무기로 삼음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차별과 억압의 사회를 거부했다.
그는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았다. 그는 남성의 주인이었다.
결혼 후 그녀의 첫 상대가 천한 신분의 은장이(銀匠)였던 점부터가 어우동의
삶이 지닌 혁명성을 예고한다.
『용재총화』는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은장이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다가 내실로 끌어들여 마음껏 음탕한 짓을 했다”
라고 적고 있다. 친정으로 쫓겨난 어우동은 곧 여종과 길가의 집을 구해 독립했다
조선시대판 커밍 아웃(coming out)이었다.
어우동의 애욕 대상에는 전 남편의 친척이기도 한 종친 방산수(方山守)
이난(李▩)도 들어 있었다. 이난은 어우동의 자색도 자색이지만 한시를
종횡으로 짓기까지 하는 재능에 반해 어느날 자신의 팔뚝에 이름을 새겨달라고
그녀에게 요청했다.
이는 스스로 어우동의 소유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이난 뿐 아니었다.
종을 매매하는 일로 만난 전의감(典醫監)의 박강창과 길에서 만난
서리 감의향(甘義享)도 팔뚝과 등에다 이름을 새겨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
어우동과 여종은 길가의 집에서 오가는 남자를 점찍었는데,여종이 “아무개는
나이가 젊고, 또 아무개는 코가 커서 주인께서 가지실만 합니다” 라고 말하면
어우동은 “아무개는 내가 맡고, 아무개는 네게 주겠다” 며 남성들을 분배했다.
생원 한 명이 집 앞에서 어우동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여종에게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이 아니냐?”고 묻자 여종은 서슴없이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어우동을 노류장화라고 생각한 생원은 어우동을 희롱하며 뒤를 따랐다.
집에 도착한 어우동이 침방에서 비파를 타면서 성명을 묻자 그는 “이생원” 이라고
대답했다. 어우동은 “장안에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라며 화를 벌컥 냈다. 그는 “춘양군(春陽君)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라며 이승언이란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게 큰 감옥일 뿐이었던 나라 조선에서 어우동은 아버지와 남편,
아들에게 속하지 않은 유일한 독립여성이자 남성들에 대한 선택권을 쥔
유일한 자유여성이었다.
사실 어우동의 이런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공간에 뛰어든 것은 그런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남성
사대부들이었다. 그것도 종친에서 공신 출신 벼슬아치까지 조선을 지배하는
사대부들이었다. 종친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는 단옷날 그네 뛰는
어우동의 모습에 반해 남양군(南陽郡)의 서울사무실인 경저(京邸)에서
정을 통한 후 어우동의 길가 집에 드나들었다.
적개·좌리공신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어유소(魚有沼)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祠堂)에서 어우동과 정을 통했다.
이런 사실들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사건이 한번
드러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종친과 공신, 그리고 벼슬아치들을 중심으로
관련된 사내만 20 여명에 가까웠던 것이다. 특히 근엄한 종친 사대부들의
위선적인 애정행각이 드러나면서 조정은 섹스스캔들의 충격에 휩싸였다.
어우동이 이난, 이기와 함께 의금부에 구속된 가운데 수사가 확대되자
대부분의 남성들은 관계를 부인했다. 성종은 그 자신이 호색이기도 한 때문인지
어우동과 상대 남자 모두를 관대하게 처리하려 했으나 위기감을 느낀
일부 사대부들이 강경처벌을 주장했다. 성종은 결국 어우동만을 음부(淫婦)로
몰아 ‘삼종지도’의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승정원은 어우동의 죄를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정해 교부대시(絞不待時:늦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그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남성지배 이념에 맞선 독립생활의 대가는 이처럼 가혹한 것이었다.
『성종실록』의 사신(史臣)이 그녀의 사형을 주장한 김계창에 대해
‘이때의 의논이 그르게 여기었다’고 비난한 것이 역사가 전하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녀와 통정했던 남성들은 성종 13년 8월 이난과 이기가 유배형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고 조선의 남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삼종지도를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