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信仰)과도 같은 존재였다.
19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Autoban)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해가며 서둘렀다.
이 때문에 428㎞의 도로는 2년5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밀어붙이기식 공사로 77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1970년 7월 7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됐다.
박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